몰빵영감의 이민 수기(2막1장)- 미국에서 캐나다로
그러니까 머리털 나고 이곳 북미 대륙에 처음으로 와 본 시점은 1995년 8월 1일입니다..
지금으로부터 약 18년전 캐나다 토론토 주변머리에 위치한 리치먼드 힐 타운 ..
타운센터 주변에 있는 비즈니스 디스트릭트에 소재한 밧데리 연구소 및 제조 설비 회사였습니다.
2차 전지 기술 공동 프로젝트를 수행하기 위하여 한국의 용병들이 이곳에 온 것으로 인연이 시작됩니다.
캐나다 랜딩 무렵인 6년 전 정착지를 이 동네로 정한 후 그 회사의 독일계인 사장을 만나기 위하여 방문한 적이 있었는데 그 몇년전에 세상을 하직했다는 리셉셔니스트의 설명을 들어야 했습니다.. 그럼 일본인 와이프는? 남편의 대를 이어 사장직에 있다는 말을 듣고 문을 나섰습니다..
당시 같이 프로젝트에 참석했던 멤버들의 존재를 물으니 어느 누구도 자리에 있지 않다 하기에 세월의 무상함이 절로 들었습니다..
그러한 캐나다의 인연으로 이민을 결심한 것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민을 결행할 무렵 당시의 캐나다의 생활이(6개월) 이민 결심에 어느 정도의 작용을 한 것은 사실입니다..
Y2K 가 조금 지난 시점에서 어찌어찌해서 이민을 가려고 했던 것인지 아니면 누군가 가라고 했던 것인지 저 조차도 잘 모르겠습니다..
당시 캐나다로 이민길에 오르기 위하여 2002년에 어플라이를 하였는데 우역곡절이 있어 첫 정착지는 캐나다가 아니고 이웃 나라인 미국서 부터 해외 생활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게 2003년 2월 일이니 벌써 10년이 지났습니다.. 에고..
우리는 흔히들 이민을 인생의 2막이라 부릅니다..
물론 저 또한 이러한 정의에 동의합니다..
그런데 저의 인생 2막을 시작한 미국에서의 이민은 처음부터 꼬이기 시작하였고, 쉽지 않은 이민 생활은 제가 감히 감당하기 힘들 정도의 혹독한 시련과 함께 어려운 시간이 전개되고야 말았습니다..
군대 생활 5년이란 짧지 않은 기간을 지낸 저로서는 오히려 군생활이 편했다는 자조적인 생각을 하면서 이를 악물고 혹독했던 미국 생활을 견뎌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미국이민의 어려운 과정 때문인지 저는 제 인생을 3막으로 나누어 보곤 합니다..
왜냐면 이곳 캐나다에서 버텨 내고 있는 힘의 원천은 한 마디로 미국에서 생활이라고 보기 때문인 것이죠..따라서 저의 캐나다이민 생활은 미국을 빼놓고 생각 할 수가 없습니다..
한국에서의 인생 1막
미국이민은 인생 2막..
그리고 현재 살아가고 있는 캐나다의 생활이 3막이지요..
비록 미국생활은 약 4.5년 정도의 짧은 시간였지만 그 이전에 느껴보지 못한 쓰디 쓴 맛을 겪어 본 시기였습니다..
해외에 나와서 살아 보니 교민 대부분이 자신의 한국에서의 잘 나갔던 시절이 생각나는지 각자의 무용담을 이야기하고 싶어하고 또 자랑삼아 말하는 것을 종종 보곤 합니다..
저 또한 세대의 특성상 그런 측면이 있다고 보여 지는데,
당시 비행기에 타고 있던 저의 생각은 이렇댔습니다..
한국에서의 모든 기득권을 태평양에 다 던지자
나는 돌아갈 다리를 다 불살랐다
그리고 이민가서 뼈를 묻자..
저는 한국에서 신의 직장이라 하는 ,음 더 좋은 신의 직장이라고 불리는 곳에서 일했었다는 정도로만 제 소개를 할까 합니다..
오늘 봉봉님의 카페에 가입하여 첫빧따로 이민수기 써 봅니다..
오늘부터 몇 차례에 걸쳐 이민 11년차인 저의 경험담을 시간날 때마다 서술식으로 옮겨 보고자 하니 졸필이라고 생각되시더라도 이해 해주시고 읽으신 분들에게는 이민 또는 이민 준비에 있어서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었으면 하는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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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과의 이별 그리고 캐나다 랜딩
2007년 5월 2일 , 약 5년간의 미국생활을 마감한 나는 미시간주의 동쪽 항구 도시 port huron을 통해 캐나다의 Sarnia를 통하여 랜딩하였습니다.
운전내내 지난 미국생활의 만감이 교차하며 다른 나라에서의 시작에 대한 두려움 반 설레임 반으로 미래로 머리가 복잡하였습니다.
미국 미시간주의 동쪽에 위치한 port huron 과 마주한 캐나다 국경도시 Sarnia 가 다가 올수록 2003년 2월 미국 시카고 의 o’ hare 공항을 통하여 가족과 함께미국으로 입국한 순간이 스쳐 지나갑니다.
그로부터 약 5년 후 캐나다 이민비자를 받고 영주를 목적으로 육로를 통해 캐나다 랜딩을 하게 되니 그때 와는 사뭇 다른 기대 반 흥분 반인 상태였습니다.
어쩔 수 없이 선택한 캐나다 랜딩…. 그러나 후회하지 말자 라고 굳건하게 다짐을 했고 미국서 살면서 끝을 보자는 아내를 설득해야만 했던 나로서는 책임감 때문에 더욱더 마음이 무거웠습니다..
잘되면 다행이지만 잘못 풀리면 어떡하지라는 막연한 불안감이 존재하였던 것이었죠..
미국으로 도미한 지 3년이 넘은 2006년 3월의 어느 날이었습니다.
2002년에 신청한 캐나다 이민 서류가 통과되어 버팔로에서 인터뷰가 있다고 이주공사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이민 서류를 접수할 당시만해도(2002년) 노인터뷰로 가볍게 이민비자를 얻을 수 있었다는게 이주공사의 의견이었는데 미국 911 이후로 캐나다 이민법이 여러차례 바뀌면서 케이스 진행이 3차례의 중단과, 재진행이 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영사 인터뷰가 잡히게 됐다는 것이었습니다.
이주공사측에서 인터뷰 응시여부를 결정하라고 요구했고 본인은 일단 인터뷰에 응하였습니다..
버팔로에 있는 캐나다 영사관에서 영어 인터뷰를 보았으며 이후 진행은 인터뷰 합격, 신체검사 통보순으로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래서 제 케이스가 완료된 시기는 2006년 8월경으로서 프로세싱만 약 만 4년이 걸린 지독한 운이 없는 경우였습니다..(그러나 이것은 후일 제게 크나 큰 행운이었습니다)
캐나다 이민국에서 내가 보내준 여권에 이민비자 유효기간을 적어 보냈는데 나의 랜딩기한은 2007년 5월 4일로서 미국에서 약 9개월 정도 더 머무룰 수 있었습니다..
머리를 굴려 버틸 때까지 버티다가(미국 영주권 스폰서 잡으려고 버티었음) 여의치 않으면 유효기간 만료 2일전에 랜딩하려고 계획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9개월이란 시간은 내겐 너무나 짧았고 더군다나 e2비자로 신분변경해보려고 검토를 했지만 내겐 돈이 없어 모든게 물거품이 되어 결국 캐나다로의 랜딩을 결심하게 이르렀습니다..
결국 랜딩 유효기간 1.5 개월을 남겨두고 고문변호사와 상의 끝에,
‘선생님은 캐나다 랜딩 하시는 것이 맞습니다. 캐나다 영주권도 나쁘지 않습니다. 아이들을 생각하신다면 더 더욱 가셔야 합니다’
라는 결론과 함께 결국 캐나다 랜딩을 결정을 해야만 했습니다.
그러한 과정에서 가장 가슴 아픈 부분은 하던 비즈니스가 안정단계에 있었는데 거기서 접게 되어서 굉장한 아쉬움이 남습니다..
사족
첫편은 전체적인 내용이고요,
다음 2편에서는 미국에서 생활했던 4.5년 정도의 이야기를 본격적으로 펼쳐보겠습니다.
방장님 만약 이 포스팅이 본 카페의 취지와 일치되지 않는다고 판단되시면 삭제하셔도 무방합니다.. 아니면 계속..